심재천 - 나의 토익 만점수기
"요즘 토익 만점은 뭐, '나 눈 두 개 달렸소'하는 것과 같지."
겸손도 아니었고, 농담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찡 울렸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본문 18쪽)
지난 달 시험 개정전 마지막 구토익에 몰린 시험 신청자가 18만명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4년 전 토익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험지에 필기하면 안되는 줄 알고 치렀던 첫 시험을 시작으로 어언 7번째로 시험을 치렀다.
기출문제도 없고, 뭐가 틀린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 놓은 점수도 2년 뒤면 말소되고 만다. 이렇게만 봐도 우리는 그냥 무모하게 ETS에게 당하고 있는게 분명한데, 그 어느누구도 맞서서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참고서를 사고, 학원을 등록하고 토익을 열심히 공부한다.
토익점수가 곧 성실성이자 능력을 반영한다는 종교에 가까운 그 굳건한 믿음이 한국 사회의 도처에 널렸다. 그런 미쳐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조차 미치면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나라. 그리고 여기 나 사람이오 하고 증명하기 위해 호주에 간 남자가 있다.
토익 590점이라는, 웬만한 회사 지원 자격조차 안 되는 점수를 가지고 있는 '나'는 토익 만점을 받기 위해 과감히 호주행을 택한다. 그곳에선 그냥 숨 쉬고 생활하는 자체가 다 영어공부니까. 호스텔을 전전하며 친구들을 사귀고, 어쩌다 타지에서 마약운반에 가담하게 된 주인공은 스티브라는 호주인이 운영하는 바나나농장을 가장한 마약농장에서 자발적으로 인질이 된다.
농장에서 보고 겪는 모든 상황들을 토익식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놀라운 적응력으로 스티브와 함께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어느 날 난데없이 땅속에서 나타난 심상치 않은 여자 요코를 만난다. 그런데 이상한 건 처음 본 그녀가 낯설지 않았다는 것. 그녀에게는 익숙한 물냉면 냄새가 났다.
언뜻 보기에도 주인공의 여정은 토익 만점을 받기 위한 거라기엔 무모하고 분에 넘치게 스펙타클하다. 그럼에도 그런 주인공의 행동과 결심이 억지스럽기보단 납득이 간다. 그리고 좀 멋있다. 재고 따지고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려고 하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 실천을 그대로 따르는 주인공의 그 우직한 마음이 요즘 사람 같지 않달까.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아버지 이야기. 배 곪았던 그 시절. 따뜻한 밥 한끼, 보드라운 양말 한 켤레가 종교보다도 더 간절하게 한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걸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소설 속에서는 그런 몰이해가 불러오는 폭력성과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처 또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280여 페이지의 장편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좋아 이틀간 틈틈이 다 읽었다. 읽으면서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목표를 위해 이렇게 재밌고 스릴 넘치는 경험을 한 주인공이 그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때, 사실은 그 모습이 곧 내 자신은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게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어떤 사람은 틀려도 벌써 틀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 정답이 있는게 아니라 그저 결말은 없고 자신만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로 채워나가는 거라면, 그건 0부터 990점까지의 어느 점수 한가운데에 기록되지도 측정되지도 않는 한 8차원쯤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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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6
빗방울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야, 반갑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난 그 녀석을 안다. 빗물에서 닭고기덮밥 맛이 났다. 그 빗방울의 전신은 내가 1년 전 잠원동 분식집 앞에서 뱉은 침이다.
그날은 토익시험을 본 일요일이었다. 시험이 끝난 뒤, 고사장 앞 분식집에서 닭고기덮밥을 먹었다. 시험을 망쳤기 때문에 밖에 나오자마자 침을 퉤 뱉었다. 그 침이 증발되고, 수증기로 떠돌다가 이곳에서 비가 되어 내게 떨어졌다. 틀림없다. 빗물엔 그런 맛이 난다.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위염을 앓는 젊은이의 침 맛이다. 그날 토익 점수는 535점이라고 기억한다.
다른 빗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짠맛이 난다. 보나마나 이건 아버지의 눈물.
2년 전, 앞마당에서 기도하며 흘린 눈물이라고 추정된다. 아버지가 남몰래 우셨구나,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의 눈물은 구름이 되어 지구를 열세 바퀴 돌다가 지금 내게 떨어졌다.
p181
'I, YOU, UNDERSTAND'와 'I understand what you said'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더듬더듬 엉터리로 쓰인 문장 쪽이 내 가슴을 더욱 흔들어놓는다. 'i understand what you said'같은 매끄러운 문장으로는 가슴속 진동이 일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지난 15년 동안 가슴에 쌓여 있던 찌꺼기가 불살라지는 느낌을 못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간단한 인사말이다.
AGAIN, SEE.
또 보자.
p208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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